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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13. <부정공>학생공휘형규가장(學生公諱亨奎家狀)
1. 문헌 목록 〉21. 21世 〉15. <부정공>송촌공휘민규가장(松村公諱敏奎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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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학생공휘몽현행장(學生公諱夢鉉行狀)
學生公諱夢鉉行狀 公諱夢鉉字允弼上世有諱璋高麗門下侍中三傳至諱元吉門下侍中與鄭圃隱偰芸亭協贊一等勳封玉川府院君玉川即今淳昌郡也生諱瑜副正及鼎革后題不朝峴言志錄曰首陽山月照我心肝 太宗朝屢徵以漢城判尹皆不就天性至孝當麗末短喪惟公與圃冶諸賢遵三年制前後居廬晚自淳昌移居于順天之謙川爲子孫世庄許聞 世宗遣禮官葬以一品禮 命旌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幷褒其罔僕之義也子諱斯文 贈吏議子諱智崙參禮道察訪築亭謙川上四昆季農夕同處以盡堪樂扁以相好子諱穩尚端院直長子諱淑璟忠順衛子諱大春蔭勵節校尉當乙巳士禍見機南下築亭於漾碧江上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結道義交多有唱和子諱懋以才行薦除禮賓寺參奉子吼晫宣敎郎子諱時聖通德郎以 孝命旌再傳諱之賓言行簡重累入鄉薦子諱台望雅性樂易氣貌端正寔公五世以上也高祖諱成夏持身清儉事親奉祭備盡情禮曾祖諱昌淳祖諱一根氣稟端嚴志宇清爽事親至孝與出系兄力供甘旨愛養之誠日日尤篤鄉隣稱嘆考諱冑燁天性純眞不顧貧寒切於爲先妣金海金氏在安女有婦德淑行哲宗辛酉二月六日生公于住岩坊大龜村第幼而頴悟天賦性孝嘗因父親以山訟事橫罹浴川縣官售貧無所資故不得巳行乞村市養體不乏縣近婦女感其誠孝自相倫番推食食之澣衣衣之各自訴寃於當路積月解歸鄉隣稱之以孝感所致嘗曰孝者人之所得於天而上自祖先相授傳法也主天之下爲人子者所當自盡者也勵志篤行釣於水樵於山以供子職積年侍湯未嘗一日離側適口之味極力辨備以供甘旨口體之養如此其至則養志之誠豈有不至者哉及丁内外艱攀號擗踊之節拌跪受吊之禮朝夕省墓風雨不廢每當先忌極其嚴敬又篤於治圃紡績之間家計少安奉納先考位土公之所以處於父母之生前死後一是出於至誠而非勉強模效之爲也然則子夏氏所謂吾必謂之學矣之言其在公也歟嗚呼行年七十卒以庚午三月十七日葬于大龜村西乾楓燈酉坐是日也會葬者胎數百餘而嗟惜曰今世上董生去矣配金海金氏源斗女極有貞淑婦德生以高宗乙丑二月十二日卒以辛未十月十六日墓住岩白鹿村后鳴幕洞長基嶝上峰艮坐生一男三女男曰淵元女適竹山安興煥昌寧曺圭澤延日鄭先源孫東恂東膳東冑曾孫秉勳旺勳芳勳長孫出明勳矼勳次孫出其外内外男孫多至數十歐陽子所謂爲孝無不報而遲速有時之言信不虛也嗚呼根深者其葉必茂於此可驗公之平日修善行誼之所致也歟公之主鬯孫東恂請於余日王大父 孝行世人所共知然只止於口於口傳而己願爲文以免湮沒於來世余私念於公爲四從孫也誼不敢辭感其誠忘其拙玆記大畧而以竢後之立言君子銘之資焉 戊申九月重陽日 四從孫 致洙 謹識 학생공휘몽현행장(學生公諱夢鉉行狀) 공의 휘는 몽현이요 자는 윤필(允弼)이며 옥천조씨이다。 상조(上祖) 휘 장(璋)은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삼전하여 휘 원길(元吉)이 문하시중인데 정몽주·설예정(偰藝亭)과 더불어 왕실을 협찬(協贊)한 一등훈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하여졌으니 옥천은 곧 지금의 순창군이다。 생휘 유(瑜)의 벼슬은 부정인데 고려가 망하매 부조현(不朝峴) 언지록(言志錄)에 『수양(首陽)산 달이 내 폐부(肺腑)에 비친다』고 쓰고 조선 태종(太宗) 때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여 고려 말 단상(短喪) 때 포은·야은 등 여러 현인과 함께 전후 초상에 三년 시묘하고 말년에 순창으로부터 순천 겸천(謙川)에 이거 하여 자손의 세장(世庄)을 삼았다。 서거(逝去)하시자 세종대왕께서는 예관을 보내 一품의 예로 장사하고 효자 전부정 조유의 이문이다하고 정포하시니 대개 그 충효 양전을 아울러 포양한 것이다。 생휘 사문(斯文)은 증 이조 참의요、 생휘 지윤(智崙)은 삼예도 찰방인데 겸천우에 정자를 짓고 四형제가 주야로 함께 거처하며 즐기고 상호(相好)로써 현판하였으며 생휘 온(穩)은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이요 생휘 숙경(淑璟)은 충순위(忠順衛)고 생휘 대춘(大春)은 음여절 교위(蔭勵節校尉)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조짐(兆朕)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와 양벽(漾碧) 강상에 정자를 짓고 김하서(金河西)·백옥봉(白玉峰) 두 선생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며 많은 수창(酬唱)이 있었고 생휘 무(懋)는 예빈시 참봉이요 생휘 탁(晫)은 선교랑(宣敎郎)이며 생휘 시성(時聖)은 통덕랑인데 효행으로 정포를 받았다。 두 번 전하여 휘 지빈(之賓)은 말과 행의가 간결하고 후중하여 여러 번 향천에 들었으며 생휘 태망(台望)은 천성이 순후하고 미우(眉宇)가 단정하시니 곧 공의 五세이상 이시다。 고조 휘 성하(成夏)는 몸가짐이 첨검하고 정과 예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며 증조의 휘는 창순(昌淳)이요 조의 휘는 일근(一根)인데 기우와 품부가 단아하고 엄하며 뜻과 품성이 맑고 상쾌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기극히 효도하였다。 출계한 형과 더불어 좋은 반찬을 장만하여 사랑한 정성이 날로 더욱 독실하니 향방이 모두 칭찬하였다。 고의 휘는 주업인데 천성이 순진하여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이를 돌보지 않고 선영에 정성을 다하였다。 비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재안(在安)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철종(哲宗) 신유년(辛酉年一八六一) 二월 六일에 대구(大龜)세장에서 공은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천부의 품성이 효순하며 일찍 부친이 산송(山訟)의 일로서 사건이 곡성 현청에 매였는데 지극히 가난하여 비용이 없는고로 부득이 촌저자에 다니며 빌어 봉양할 것을 떨치지 아니하니 고을 근처 부녀자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서로 교대하여 미루어 먹이고 옷을 빨아 입히며 각기 스스로 원통함을 현청에 호소하여 한달 만에 해결하고 돌아오니 고을과 이웃이 이는 효행에 감동한 소치라 칭도하였다。 일찍 말하기를 『효도는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로 위로 조선으로부터 서로 주고 전한 법이니 하늘 아래 사람의 자식된 자는 마땅히 스스로 행할 바이다。』라고 하며 뜻을 가다듬어 독실히 행하며 물에 나가 고기를 낚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여 자식의 직책을 다하며 여러 해를 시탕하되 일찌기 하루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입에 맞는 반찬을 힘을 다하여 준비하여 이으니 입과 몸의 봉양이 이와 같이 지극한즉 뜻을 기룬 정성이 어찌 기극하지 아니하겠는가。 부모님 상사를 당함에 휘어잡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두드리고 뛰는 절차와 꿇어 앉아 조문받는 예며 아침 저녘 성묘를 비바람으로 페치 아니하고 매양 선영의 제삿날을 당하며 공경을 다하였다。 또 농사하고 길쌈하는 사이에 가도가 조금 늘어 선고 위토답을 상납하였으며 공의 부모 생전 사후간 치성은 한결같이 지성에 의한 것이요、 억지로 본받아 한 일은 아니다。 그런즉、 자하씨(子夏氏)가 이른바 『내가 반드시 배웠다 말한 것』이 공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아、 향년 七十세로 경오년(庚午年) 三월 十七일에 별세하여 대구촌서 건풍등 유좌원(大龜村西 乾楓嶝酉坐原)에 장사하니、 그 당시에 장례식장에 모인 수백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동생(董生)이 갔다。』고 하였다。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 원두(源斗)의 따님으로 극히 정숙한 부덕이 있었는데 고종 을축년(乙丑年一八六五) 二월 十二일에 출생하여 신미년(辛未年) 十월 十六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주암 백록촌후 명막동 장기등 상봉 간좌(住岩面 白鹿村後 鳴幕洞 長基嶝上峰艮坐)였다。 아들은 연원(淵元)이요 딸은 죽산(竹山) 안 흥환(安興煥)·창녕(昌寧) 조 규택(曺圭澤)·연일(延日) 정 선원(鄭先源)의 부인이며、 손자는 동순(東恂)·동선(東膳)·동주(東冑)요 증손 병훈(秉勳)·왕흡(旺勳)·방훈(芳勳)은 장손 소생이며、 명훈(明勳)·강훈(矼勳)은 차손출이고 그외의 내외 손남이 많아 수십인에 이르렀으니 구양자(歐陽永修古賢人)의 이른바 효도하고 보시가 없지 아니하나 빠르고 더딤이 있단 말이 실로 허언이 아니도다。 아、 뿌리가 단단하면 그 잎이 반드시 무성하다는 것이 이에서 가히 증험하였도다 공이 평일에 착하게 닦은 행의의 소치인가。 공의 주창손 동순이 나에게 청하되 왕대부 효행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바나 다만 구전일 따름이니 내세에 전하도록 글로 써 달라 함으로 나 또한 공의 四종손이라 의리상 감히 사절치 못하고 성의에 감동하여 졸함을 잊고 이에 대강 기록하여 써 후일 지덕자의 채택을 기다린다。 四종손(四從孫) 치수(致洙)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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